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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는 자신의 풍자 산문집 한 지면에 다음과 같이 쓴다. “K씨는 너무 자주 희망을 생각의 아버지라 여긴다는 비난을 받았다. K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희망이 아버지가 아닌 생각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다음 문장을 참조할 것. “희망은 생각의 아버지야, 헨리.”(셰익스피어, 『헨리 4세』, 4막)” 여기서 생각과 희망의 관계는 생경하다. 생각이 희망으로부터 비롯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브레히트는 책의 다른 지면에 이렇게 쓴 다. “생각한다는 건 곧 변화를 일으킨다는 뜻이지. 내가 어떤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를 변화시키는 거야.” 이 두 문장을 놓고 보면, 브레히트가 왜 생각을 희망으로부터 비롯한다고 말하는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생각하기는 사물의 변화와 관련하고 나아가 변화를 추동하기 때문이다. 사과에 대해 생각해보자.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과는 당신이 사과라고 여기는 무언가와 얼마나 다른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올려 보자. 당신의 생각에서 그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전쟁에 대해 생각해보자. 당신은 그 상황을 어디로, 어떻게 이끌고 갈 수 있을 것인가?
생각에 대한 우리의 흔한 착각 중 하나는 무언가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을 두고 그 무언가를 재현하는 일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마치 사진이나 영상, 혹은 언어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단순히 이미지적으로, 언어적으로 머리 속에 투사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생각을 하는 순간 그 무언가는 재현을 넘어서서 움직인다. 언제나 그 무엇과는 다른 무엇이 산출된다. 조금 전 당신이 사과와, 사랑하는 누군가와, 전쟁에 대해 생각했을 때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죽음’과 같은 실체 없는 무언가에 대해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생각하기가 하나의 운동성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생각을 할 때 우리는 종종 우두커니 서있거나 가만히 앉아 있곤 하지만, 생각 그 자체는 과격하게 기울어져 있는 몸의 상태, 당장이라도 균형을 잃고 어떤 방향으로든 튀어 나가버릴 것 같은 운동성이다. 그 역동성에 휩쓸려 갈 때 비로소 생각하기에 진입하게 된다. 그러니 생각하기라는 운동을 이끌어내기 위해 우리는 종종 자리에서 일어나 방향 없는 산책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